카테고리 없음

제천국제음악영화제를 가다, 이와이 슌지 감독 리뷰

kimshoko 2024. 11. 25. 19:33


9월 초, 가을이지만 아직도 너무나도 더웠던 계절이었습니다.
제천에서 열렸던 제천국제음악영화제에 다녀왔습니다.

제천예술의전당. 이날 하늘이 정말 이뻤다.


 살면서 영화제에 가 보는 것도 처음. 제천이라는 동네에 가 보는 것도 처음. (저는 제천이 어디 있는 곳인지도, 부끄럽지만, 잘 몰랐습니다.)
가게 된 이유는 그저 제가 좋아하는 ‘이와이 슌지’ 감독이 온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와이 슌지 감독


가장 최근작 ‘키리에의 노래(2023)’ 감독판을 같이 시청하고, 이와이 슌지 감독의 인터뷰를 1시간정도 함께 들을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게다가, 직접 감독님을 마주쳐서 사인도 받고 같이 대화도 잠깐 나눌 수 있었습니다.
 

영화 <키리에의 노래>


‘키리에의 노래’는 썩 괜찮은 영화였네요.
이와이 슌지 감독 특유의 자연광을 사용하는 촬영이나, 무엇보다 일본 인디 가수 씬의 분위기를 잘 담아서 영상이 참 아름다웠습니다. 살짝 이야기 진행이 산만한 감은 있었어요. 너무 많은 주제(음악, 재난, 범죄, 미스터리 등등)를 한번에 다룰려고 했던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그 점은 조금 아쉬웠지만, 그래도 감독판에서는 어느정도 설명이 된 것 같아 만족했습니다. 비슷한 소재를 다뤘던 (고마츠 나나가 나와서 봤던) ‘굿바이, 입술(2019)’이 뭔가 보는 내내 계속 생각났어요.

영화 <굿바이, 입술>



 
.
.
.
 

 

<러브레터>의 그 장면


이와이 슌지 감독의 대표작은 역시 ‘러브레터(1995)’. 가장 한국인에게 사랑받는 일본 실사 영화 중 하나이다. 마지막 설원에서의 ‘오겡끼데스까’ 씬은 로맨스의 전설이 되어버렸다. ‘하나와 앨리스(2004)’도 간질간질한 삼각관계를 그린 로맨스 영화… 이 작품에서의 아오이 유우는 정말 그 자체다.
 

<하나와 앨리스>의 아오이 유우



<릴리 슈슈>


하지만 요즘 젊은 세대들에게 컬트적으로 주목받는 작품은 ‘릴리 슈슈의 모든 것(2001)’일수도 있겠다. 두 작품과는 급격하게 다른 분위기라서, 같은 감독이 만든 작품이 맞는지 의심하게 한다. ‘릴리 슈슈’라는 가상의 가수를 좋아하는 4명의 고등학생을 중심으로 일어나는 비극은, 이지메(왕따), 학교폭력, 우울증, 소외감, 불안, 상처, 죽음에 대한 깊고 깊은 고찰을 다룬다. 이 영화를 보고 나서의 여운은 표현하기 어렵다. 나도 한동안 ost를 들으며 멍하니 있는 시간이 많았다.
 
 팬들은 이와이 슌지 감독을 밝고 따뜻한 분위기의 ‘화이트 이와이’와 어둡고 우울한 분위기의 ‘블랙 이와이’로 구분하기도 한다. 그리고 나한테 어느쪽을 좋아하냐고 물어본다면, 확실히 나는 이와이 슌지의 암울함을 다루는 시선을 좋아한다. 사람들은 때로 아름다운 감동의 메세지보다도 한없이 우울한 예술에 위로받기도 한다. 이와이 슌지 감독은 폭력을 굉장히 압도적이고 비극적으로, 또 현실적으로 표현하지만, 사람들이 그것에 위로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약간의 스포일러 포함*

마지막 공연장 씬 중


1.     ‘릴리 슈슈의 모든 것’에서 남자 주인공이 소리를 지르는 장면이 있다. 작품 중반, 호시노가 들판에서 몸을 비틀어가며 처절하게 우는 장면과, 작품의 마지막에서, 하스미가 릴리 슈슈의 공연장에서 소리치는 장면. 물론 호시노는 악인이다. 하지만 나는 그 두 비명 사이에서 너무 비슷한 감각을 느꼈던 것이다.
 
2.     ‘키리에의 노래’에서 키리에가 강간을 당하는 장면이 있다. 하지만 실제 강간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분노에 휩싸인 아저씨도 사실은 결혼사기의 피해자이다. 물론, 키리에에게 행한 폭력이 정당화되지는 않는다. 그런데 나는 그 아저씨의 눈물에서 연민을 느꼈던 것이다.
 
이것은 자칫 가해자를 옹호할 수 있다는 점에서, 조금 위험한 해석일 수도 있지만 계속해보자면-내 생각에 이와이 슌지 감독은 폭력을 단순히 가해자-피해자의 구조로만 다루고 있지 않다. 사람들은 모두 서로 상처주며 살아간다. 때로는 상처주고, 때로는 상처받는다. 우리 모두 가해자성과 피해자성을 동시에 지니고 살아간다.
 
‘상처’라는 키워드는 중요하다. 이와이 슌지 감독은, 상처라는 단어를 굉장히 넓게 사용한다. 감독의 생각을 엿볼 수 있는 힌트가 있다. 영화 ost중 ‘回復する傷(회복하는 상처)’라는 트랙은, 원래는 가사가 없는 음악이지만, 영화의 소설판에서는 이와이 슌지 감독이 직접 쓴 가사가 수록되어 있다.

 
저녁노을이 우울을 데려와
투명한 공기는 무거워지고
어차피 반복될 일상이라면
하루 만에 끝나버려도 괜찮을 텐데
생이 죽음의 뒷편이라면
살아 있는 것처럼 죽어보고 싶어
 
사랑에서 시작되는 이야기를
지워버리고 백지로 돌아가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시절로
실은 당신을 사랑한 게 아니고
당신의 쓴 한숨만을 위해서 믿어왔던 거야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거울 앞에 서서
억지로 미소를 만들어봐도 어쩔 수 없어
손에 물을 모아 표정을 씻어내고서 지금 당장 떠나자
모든 것을 끝내고 싶어 이곳에는 더는 살아갈 의미가 없어
 
나의 피로 길러낸 시클라멘의 꽃봉오리에
꽃이 붉게 핀다면
내 상처도 치유되어 가겠지
 
사랑에서 시작되는 이야기를
지워버리고 백지로 돌아가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시절로
실은 당신을 사랑한 게 아니고
당신의 쓴 한숨만을 위해서 믿어왔던 거야
 

-소설판 412~413p.

 

이 가사를 시로서 해석해보자면, 일단 화자는 깊은 우울감에 빠져있다. 자신이 처한 상황을 이야기하면서, 자기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한다. 하지만 화자는 삶을 끝내고 싶어 하면서도, 다시 백지로 돌아가자는 의지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이 바로 이와이 슌지가 말하는 ‘회복’이다. 상처의 회복을 위해서 역설적으로 결국 상처를 마주해야만 한다. 그것은 준 상처일 수도 있고, 받은 상처일수도 있다. 하지만 그제서야 다시 시작할 용기를 얻을 수 있다. 이와이 슌지가 어두움을 통해 전하고자 하는 메세지는 폭력의 고발이 아닌, 오히려 폭력을 있는 그대로 보여줌으로써 관객들이 그것을 받아들이게 만드는 것이다.
 
이런 문법의 예술은 지금 세대에게 더 와닿는 듯 하다. 이제 말뿐인 위로는 필요하지가 않다. 나는 항상, 그냥 솔직하게 말해주는게 더 좋았다고 생각했다. 한동안 우울한 영화나 애니메이션에 빠져있던 시기가 있었는데, 건강하지는 않았다. 여전히 그런 사람의 심리를 아주 깊숙하게 파고 들어가는 작품을 사랑한다. 하지만 이제는 조금 적당히 보게 된다. 너무 힘들었던 때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다.
 
.
.
.
 

감독님 사인


그렇게 생각하고서도 나는 ‘릴리 슈슈’ 책을 들고 갔다. 그리고 이와이 슌지 감독님에게 사인을 받았다. 감독님은 왜 요즘 들어 한국 젊은 관객들이 2001년작 영화를 좋아하는지 궁금해하셨다.